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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명전:장희빈의 암투공간

by 별인천강 2024.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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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명전 일원 통명전(通明殿)은 1834년(순조 34)에 재건된 왕비의 침전입니다. 넓은 월대를 쌓고 마당에는 박석을 깔아 중궁전의 격을 높였습니다. 통명(通明)이란 음양(日+月)이 통한다는 뜻으로, 왕의 대를 이을 왕자를 생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왕비의 침전이기에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지붕입니다. 무량각지붕에 대해서는, 용(임금)이 깃드는 집에 또 용(용마루)이 있으면 두 용이 충돌하므로 용마루를 만들지 않는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궁궐의 무량각지붕은 왕과 왕비의 침전을 다른 건물과 뚜렷하게 구분하기 위해 청나라의 건축 공법을 도입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현판은 순조의 어필입니다. 통명전은 왕비의 침전이었지만, 왕실의 어른들도 사용했으며 중종과 명종비의 빈전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통명전
통명전

통명전 서쪽 마당에는 동그란 열천과 돌난간을 두른 네모난 연못이 있습니다. 이 연못은 연지(蓮池) 또는 연당(蓮塘)이라 부릅니다. 연꽃을 심은 못이라는 뜻입니다. 연꽃은 불교의 이상을 상징하는 꽃이기도 하지만, 유교의 이상인 군자를 상징하는 꽃이기도 합니다. 이곳은 장희빈의 음산한 이야기가 있는 곳입니다. 숙종 때 창경궁의 취선당(수강재 부근?)에 머물던 장희빈이 인현왕후의 처소(통명전)에 흉물을 묻은 다음 밤마다 저주의 무당굿을 퍼부었습니다. 저주의 효험(?)인지 왕비는 시름시름 종기를 앓다가 1701년에 승하하였습니다. 인현왕후 사후에 이러한 사실들이 발각되어 장희빈은 사약을 받았습니다. 당시 장희빈은 왕자(경종)를 낳아 궁녀의 신분에서 왕비자리까지 올랐다가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어 있었습니다. 반면에 폐서인이 되었던 인현왕후는 복위되어 이곳 통명전에 거처하고 있었습니다. 인현왕후는 1681년 숙종의 계비가 되고, 1689년 남인이 정치 실세로 등장하는 기사환국으로 폐비가 되어 안국동 감고당에서 지내다가, 1694년 남인이 물러나고 소론과 노론이 다시 장악한 갑술환국으로 복위되었습니다.

양화당

양화당(養和堂)은 주로 내전의 접대공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명종 20년(1565)에는 임금이 임어하여 독서당 문신들의 시험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병자호란 때는 삼전도에서 국치를 당한 인조가 환궁하여 이곳에 머무르기도 하였습니다.

양화당
양화당

인조와 조정은 병자호란(1636년 12월)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청나라에 대항하였으나, 다음해 1월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삼전도의 수항단(受降檀)에서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굴욕을 당한 인조는 저녁 늦게 이곳 양화당으로 돌아왔습니다. 또 이곳은 1878년 철종의 비 철인왕후(哲仁王后)가 승하한 곳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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